원정리 이야기
포승읍 원정리 | ||||||||||||||||||||||||||||||||||||
물이 금보다 귀했던 척박한 터에 아주 오래된 사찰 수도사가 있었고 방조제 공사와 발전소가 들어서며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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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우물이 원정리가 되다 원정리는 평택지방에서 가장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교통이 불편하고 생산기반이 취약해서 원정, 곡교, 호암, 번제와 같은 크고 작은 마을들이 가난하면서도 정겹게 모여 살던 소박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마을을 소개할 때도 ‘포승면 맨 끝 마을’이라던가 아니면 ‘봉수대가 있던 마을’ 쯤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러던 것이 1974년 남양만 방조제가 완공되고 2,285헥타르의 널따란 간척지와 남양호라는 담수호가 만들어지면서 마을도 늘어나고 생활환경도 크게 변하였다. 더구나 1980년 이후 평택화력발전소 건설을 비롯하여 1990년대 LNG기지건설, 기호물류, 수자원공사 등 기업체의 입주, 그리고 옛 호암마을에 들어선 해군제2함대사령부, 곡교마을 일원에 포승국가공단이 건설되면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마을로 변모하였다. 원정리에는 모두 8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이 가운데 본래부터 있던 마을은 원정, 번제, 곡교, 호암 뿐이고 쌍용이나 한일, 여술 같은 마을은 남양만 간척 후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원정이란 지명은 풀이하면 ‘먼우물’ 이고 마을사람들은 ‘머물’이라고 부른다. 지대가 낮고 바닷가에 인접한 평택지방은 옛부터 식수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고장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허허벌판에 자리잡은 마을은 웅덩이에 고인 물을 먹는 경우가 많았고, 심할 경우에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먼 곳까지 물을 길러 다니기도 하였다. ‘먼우물’이라는 지명은 그래서 탄생하였다. 곡교는 마을 입구에 굽은 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우리말로 ‘굽은 다리’다. 일부 문헌에는 ‘고분다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굽은 다리의 변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포승국가공단이 건설되면서 마을 전체가 원정7리 호암 마을 앞 들판으로 이주하였다. 번제는 당산 남쪽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해군제2함대사령부 정문 못미처에 있는데 함대가 들어오면서 마을의 삼분의 일이 잘려나갔다. 번제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만해도 바닷물이 들어와 넓은 호수를 이룬다고 해서 ‘번호(藩湖)’, 이곳에 제방을 쌓았다고 해서 ‘번제’로 불렸던 것이 지명으로 굳어졌다. 호암은 우리말로 ‘범바위’다. 본래 괴태산(봉화산) 서쪽 아래에 있었던 이 마을은 어업과 수산업에 약간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랬는데 1990년대 말부터 해군제2함대사령부 건설공사로 마을이 묻히고 봉우재산 서쪽이 삭뚝 잘려나가면서 산 너머 수도사 앞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여술은 ‘여울목’의 다른 이름으로 짐작된다. 이 마을은 본래 몇 호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남양만이 간척되고 당두염전, 화성농장들이 옥토로 바뀌면서 마을의 규모가 커졌다. 한일이나 쌍룡도 이 때 만들어진 지명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을 조성사업을 하던 회사의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진 것인데, 이와 같은 지명은 송탄의 복창동에서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원정리의 가장 큰 특징은 괴태마장이라는 국영목장과 괴태곶 봉수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목장의 흔적은 옛 곡교마을에서 도곡리 당두마을까지 연결되었던 ‘목장토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1899년에 편찬된 양성군지에도 나와 있다. 예컨대 양성군지의 “괴태길곶 마장 (槐台吉串 馬場), 현(縣) 서쪽 100리 승량동면에 있었는데 세 방향이 바다로 막혀있고 한 면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홍원목(洪原牧)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기록을 보면 괴태곶 목장은 지금의 안성군 양성면 동항리에 있었던 양성현 관아에서 1백리 떨어져 있었으며, 승량동면 지역의 반도(半島)에 조성되었고, 홍원목의 관할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그려진 ‘목장지도’에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있다. 이 지도에는 괴태마장엔 3개의 마장(馬場)이 조성되었다고 그려졌는데, 목장토성은 마장(馬場)의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쌓은 것이었다. 괴태마장(馬場)은 18, 19세기 쯤 화포가 발달하고 군마의 용도가 줄어들면서 폐지된 것으로 짐작된다. 대부분의 목장전들은 폐지된 후 농지로 개간되었고 목부(牧夫)의 역(役)을 담당했던 주민들도 일반 양민으로 신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괴태목장전도 농지로 개간되었을 것이다. 봉수(烽燧)는 군사적으로 위급한 사실을 신속하게 중앙으로 연락하여 대처하게 했던 근대 이전의 통신수단이다. 조선은 한양 목멱산(남산) 봉수로 연결된 5개의 봉수로를 갖고 있었다. 특히 삼남지방의 봉수로는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왜구(일본)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설치했는데, 평택지방의 봉수는 전남 순천 돌산의 방답진에서 올라오는 해안봉수 즉 제5로에 속했다. 봉수는 직봉과 간봉으로 나뉜다. 직봉(直烽)은 출발지점에서 한양까지 직접 연결된 것이라면 간봉(間烽)은 요소요소의 중요한 지역과 직봉을 연결시키는 봉수였다. 괴태곶 봉수는 아산 영인산과 팽성읍 망해산 봉수를 거쳐 화성군의 흥천산 봉수로 연결되는 직봉과 당진군 면천을 거쳐 올라오는 간봉이 만나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봉수였다. 봉수대는 원정리 봉화산(해발 83미터) 정상부에 있다. 이곳은 해발은 낮지만 남양만과 아산만일대가 한 눈에 조망되는 곳으로 봉수를 설치하기에는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봉수대는 산 정상부 2단으로 된 직사각형의 공터 위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모두 5개의 봉돈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현재 봉수대는 해군제2함대사령부 철책 안에 갇혀 있다. 그래서 군부대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접근할 수가 없는데, 엄중한 이곳도 1년에 한 번만은 전국의 시민들에게 문을 활짝 연다. 매년 새해 벽두에 서평택환경위원회 주관으로 해돋이 행사를 하기 때문이다.
원정 7리 호암마을 안에 있는 수도사는 신라 문성왕 14년(852년)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절이다. 염거화상(844)은 신라 말 선종(禪宗)의 고승인 도의선사의 1대 제자로 가지산문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창건 당시 남양만 일대는 화성군 서신면 당성을 중심으로 대당교역이 크게 발달했던 곳이다. 그래서 원정리 일대에도 현재 평택화력이 자리잡은 한나루(대진)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나루가 발달하였다.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국가의 입장에서 통치이념을 전파하기에 적절한 위치이며, 지방세력의 도움으로 성장하던 선종의 입장에서도 교세를 알리기에 좋은 장소다. 수도사의 창건도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의 영향이 컸다. 창건 후 번창하던 이 절은 여말선초 해양을 중심으로 왜구가 침입하고 수적들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폐사되었다가 조선 말 쯤 다시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수도사의 위치에 대한 고증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어느 곳에 있었다는 것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1999년 경기도 박물관에서 편찬한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에는 LNG기지 안에 절터가 있으며 주초석과 일부 석물들이 남아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오래 전에 평택농민회 회장을 역임하였던 진장웅씨는 ‘어릴적 나무하러 봉우재(봉화산)에 많이 갔었는데 어른들이 봉수대 서남쪽 지역을 가리키며 옛 수도사 터라고 일러주었다고 말하기 때문 이다. 이 같은 논란은 1914년 일제가 제작한 지도를 통하여 일부 해소될 여지가 있다. 이 지도에는 현 LNG 기지 부근에 수도사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도사는 처음 LNG기지 안에 창건되어 고려 말쯤 폐사되었다가 임진왜란 후 중건되었고, 일제강점 초기(대략 1911년)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봉화산 서남쪽에 암자를 지어 다시 중창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암자도 한국전쟁 등으로 오래 가지 못했고, 전쟁이 끝난 뒤 1960년 영석스님이 중창한 것을 1965년에 정암스님이 중건하였다. 실로 지난한 역사를 간직한 절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사에는 신라의 고승 원효(617-646)가 무덤에서 자다가 밤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던 장소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너무도 유명한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토착불교사상의 기반을 닦은 원효의 사상이 형성되는 출발점이 되었기에 더욱 관심이 높다. 그래서 최근 독실한 불교신자인 김 모 시의원 등은 원효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개발하여 지역의 문화 콘텐츠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며, 평택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업이 성공을 거두려면 면밀한 학술적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통일전후 경주에서 당성까지 연결된 육로 및 수로교통의 고증이 필수적인데 확실하다고 말하기에는 아직까지 미흡하다. 원효의 전설로 유명했던 수도사는 최근 적문스님에 의해 우리나라 전통사찰음식의 체험학습장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올해도 지난 5월 7일부터 9일까지 음식축제를 열었다는데, 건강한 음식에 곁들인 건강한 정신과 삶을 대중들에게 보시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어 마음이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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