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내기리 이야기

2008. 5. 16. 20:05그냥.. 아무거나

포승읍 내기리

 

내기리 대표적 중심 마을은 안쪽에 자리잡은 ‘안터’였다

 

 

 

함평이씨는
내기리 대표 명문가
조선시대 이대원 필두로
많은 인물 관직에 진출

이대원 장군은
국가위기 상황에서
충으로 나라를 지켜
높게 평가

 

■ ‘안터’가 내기리(內基里)로

   
▲ 내기1리 (안터)
내기리는 포승읍의 대표마을이다. 마을에는 포승읍사무소가 있고, 우체국, 보건소, 초등학교, 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승량동면으로 읍치(邑治)에서 무려 1백리나 떨어진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895년과 1896년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군 포내면이 되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위군(현 평택시)에 통합되었다.

이 지역은 함평 이씨의 동족마을로 이름났다. 면(面)의 중심에 사족집단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조선시대의 개념으로 사족들은 가급적이면 관아(官衙)가 있는 읍(邑)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곳의 중심마을은 ‘안터’다. 안터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명으로 ‘안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이웃한 희곡리, 방림리와 함께 함평이씨의 6백년 세거지다. 내기(內基)리라는 지명도 ‘안터’를 한자로 바꾼 것이다.

안터 서남쪽은 새말이고, 북동쪽에는 새터말이 자리 잡았다. 마을 규모가 그만그만한 두 마을은 모두 안터가 생긴 뒤에 새로 형성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새터말 안쪽은 속말이다.

속말은 이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이씨촌’으로도 불렸다. 속말 옆 마을은 ‘고잔’이다. 고잔은 바다가 가깝고 곶(串)이 발달한 평택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명으로 ‘곶(串)의 안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정문동 남쪽 마을은 능모루다. 능모루는 능우리라고도 하는데 ‘모루’가 ‘마루’의 변음인 것으로 봐서 이대원 장군의 묘 옆 산마루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도안(都安)은 ‘돌안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안터 동남쪽에는 승학동이 있다.

이 지명은 지형이 ‘학이 날아오르는 것과 같아서’ 유래되었다는 풍수적인 해석이 전해지지만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안터 서남쪽의 정문동은 이대원 장군의 충절정문이 세워졌던 마을이다. 일반적으로 정문(旌門)과 지명은 연관되는 경우가 드물지만 함평 이씨의 지역적 기반이 지명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돌안말 서쪽의 음동은 본래 ‘은굴’로 불렸다. 우리나라 지명에서 ‘은굴’은 과거 ‘은구덩이(銀井)’가 있었다는 증거지만 불행하게도 마을 사람 중에는 아는 이가 없었다. 정문동 서쪽에 위치한 ‘잿말’은 승배산 아래다.

승배산은 중이 절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으로 내기리의 당산(堂山)이었다. 잿말은 당산에 제(祭)를 올렸던 마을인데, 이것이 지명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른다. 
 
■ 노루가 터를 잡아준 함평 이씨 마을

   
▲ 내기3거리
내기리 함평 이씨는 평택 서부지역의 대표적 명문가다. 조선시대에는 이대원을 필두로 많은 인물이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 가문은 포승읍 내기리 안터를 중심으로 운정리(구루물), 학현리, 인광리, 희곡리, 방림리, 오성면 양교리 등에 분포하였다.

시조는 고려 광종 때 인물 이언(李彦)이다. 이언은 광종의 개혁에 동조하여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으로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졌고, 고손(高孫)인 광봉이 좌명공신으로 벽상삼중대광보국 숭록대부 함풍부원군이 되면서 함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함평을 본거지로 지방과 중앙에서 활동하던 함평 이씨가 포승면으로 이거한 것은 여말선초였다. 입향조는 사제감정을 지낸 이길중으로 쫓겨 이곳으로 낙향했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의 지배세력 교체와 관련이 깊은 듯 하다.

명문가의 입향 과정에는 전설이 한 두 개 쯤 전해오기 마련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성계처럼 변방에서 떠돌던 무인들이 출세하여 큰 권력을 잡았을 때나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유명한 재벌이 되었을 때에도 전설은 만들어진다.

조선 초 함평 이씨가 정착한 내기리는 사람살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남양만과 아산만 부근에는 왜구(倭寇)와 수적(水賊)의 침입이 빈번했고 바다가 가까워서 농경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름 있는 집안이 사회 경제적으로 척박한 지역에 입향하려면 빛나는 명분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권교체로 정치적인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사회 경제적 기반이 상실된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이거(移居)를 위한 뚜렷한 명분이 쉽게 구해질 리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입향전설이다.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조선 초의 혼란기 이길중은 정치적 박해를 피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다. 그래서 선택한 지역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졌고 후미진 벽촌 포승읍 내기리였다. 하지만 연고도 없이 숨어든 타향에서의 생활이 녹록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산에서 나무를 하게 되었다.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를 하는데 숲 속에서 노루가 뛰어나와 숨겨주기를 청하였다. 상황으로 볼 때 사냥꾼에게 쫓기는 듯 했다. 품성이 자애로운 길중은 쌓아 놓은 나뭇짐 속에 노루를 숨겨주었다.

사냥꾼이 지나간 뒤 나뭇짐에서 나온 노루는 은혜에 감사하며 누대에 복을 받을 좋은 터를 잡아주었다.” 작위적인 냄새가 나지만 함평 이씨가 복을 받는 이유를 이것처럼 멋있게 설명해 주는 이야기도 없다. 함평 이씨 집안에서 노루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도 이 이야기 한 토막으로 해석된다. 참 재미있지만 되새김이 되는 이야기다. 
 
■ 불멸의 이대원

   
▲ 이대원장군 신도비

오늘날 함평 이씨 가문의 명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은 조선 선조 때의 무관이었던 이대원이다. 이대원은 이순신 이전 전라도 바다를 지켰던 무장으로 함평이씨 가문에서는 이순신과 비견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대원의 후손인 이(李) 모 선생도 걸핏하면 ‘장군이 죽지 않았다면 이순신보다 더 큰 공을 새웠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에 대한 높은 평가의 기저에는 임진왜란 직전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라는 점 외에도, 충절로서 이름을 높여 가문을 빛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다.

사실 함평 이씨 가문은 이대원 이전에도 좌리공신이었던 이온, 군수를 지낸 이석필 등 관직에 진출한 인물을 여럿 배출했고 장군의 후손 중에도 충청수군절도사를 지냈던 이석 등이 있지만, 이대원 만큼 주목을 받는 인물은 없다.

그러면 이대원(1566~1587)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충(忠)으로서 나라를 지켰다는 점일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충(忠)은 효(孝)와 함께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대원의 삶을 한 번 살펴보자.

이대원은 절충장군에 추증된 이춘방을 아버지로 내기리 정문동에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8세의 아주 어린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조선시대 무과급제 평균 연령이 30세 전후이고 기량이 출중했던 원균 등도 20대 중반에 급제한 걸 보면 대단히 빠른 출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출중한 기량으로 관직에 나아가서도 승진을 거듭하여 1587년 21세의 약관에 정4품인 녹도만호가 되었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이 있기 2년 전으로 일본의 정탐꾼들이 곳곳에 숨어들 때였고, 경상, 전라도 해상에는 중, 소규모의 왜군들이 출몰하여 조선의 전력을 탐색하던 시기였다.

1587년 2월 전라도 고흥의 녹도 근해에도 왜선 20여 척이 출몰하였다. 이대원은 즉시 출동하여 왜군을 대파하고 적의 수급을 취한 뒤 개선하였다. 하지만 상관이었던 전라좌수사 심암은 싸우려하지도 않았으면서 전공(戰功)을 가로채려하였다.

이대원은 의지가 굳고 충성심에 불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이대원이 요구를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심암은 일주일 뒤 왜선 수 십 척이 몰려오자 지친병사 1백 명을 주어 적과 싸우게 하였다. 할 수 없이 상관의 명령에 따라 고흥 앞바다 손죽도 해상에서 3일 간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로잡힌 뒤에도 적의 회유에 굴복치 않고 끝까지 항거하자 왜군은 장군을 돛대에 매단 뒤 칼로 찔러 죽였다.

심암은 이대원이 죽었으므로 모든 일들이 덮어질 줄로 알았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부하들의 입을 통해 모든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대원의 공(功)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심암의 죄는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심암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이대원은 성혼 등의 진언에 의해 충렬공이라는 시호와 함께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신정문이 내려졌다.

정문동은 이대원의 충신정문이 세워진 마을이다. 묘(墓)는 부친인 이춘방의 묘와 함께 정문동 서쪽 소대덕산 산록에 있는데 가묘이다. 확충사는 장군이 죽은 뒤 전남 고흥군 손죽도에 세웠던 것인데 왜란 중 소실되었고 1978년 장군의 무덤 아래에 복원하였다.

신도비는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낸 손자 이석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소론의 영수 남구만이 찬(撰)하고 조상우가 썼다. 묘 앞의 사당에는 위패가 모셔졌고, 사당 앞에는 최근에 크게 조성한 동상이 세워졌다.

이만하면 현충사만은 못하지만 도일리 원균장군 묘나 사당 보다는 낫다. 하지만 현재 함평 이씨 가문에서는 이것으로도 부족한가 보다. 이들은 자꾸만 이순신과 이대원을 비교하려 한다. ‘이대원 장군이 죽지 않았다면 이순신보다 나았을 거야~’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불멸의 이순신이 아니라 ‘불멸의 이대원’을 만들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무리한 상상은 금물이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기 때문이다.

   
▲ 내기3리 (정문동)

 

출처 : 내기30회
글쓴이 : 홍성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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